다이에이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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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에이(大映)는 1942년 일본에서 설립된 영화 제작사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화 산업 재편 과정에서 신코 키네마, 대도영화, 닛카츠 제작 부서가 합병되어 설립되었다. 나가타 마사이치 사장 시기에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 기누가사 데이노스케의 《지옥문》 등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작품들을 제작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이후 경영 악화로 1971년 파산하였고, 1974년 도쿠마 쇼텐에 인수되어 영화 제작을 재개했으나, 2002년 가도카와 쇼텐에 매각되었다. 현재는 가도카와 픽처스로 알려져 있으며, 영화 외에도 애니메이션 제작 지원 및 관련 뉴스, 관련 인물에 대한 정보가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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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정부는 자원 활용을 합리화하고 영화 매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영화 산업을 재편하려 했다.[1] 신코 키네마의 임원 나가타 마사이치는 정부 계획에 반대하여 세 개의 스튜디오를 설립하는 대안을 추진했다.[1] 1942년 신코 키네마, 다이토 에이가, 닛카츠의 제작 부서가 합병하여 '''다이 니폰 에이가 세이사쿠 가부시키 가이샤'''(大日本映画製作株式会社), 줄여서 다이에이가 설립되었다.[1] 키쿠치 칸이 초대 사장을 맡았고, 나가타는 임원직을 수행했다. 다이에이의 스튜디오는 도쿄 조후와 교토 우즈마사에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전시 기업 통합이 시작되었고, 내각 정보국의 지시에 따라 영화 업계에서도 1942년(쇼와 17년), 신흥키네마, 대도영화, 닛카츠 제작 부문을 중심으로 합병이 이루어졌다. 나가타 마사카즈 등 9명이 발기인이 되어, 1942년 1월 27일에 '''다이일본영화제작 주식회사''' (대영)가 탄생하여, 쇼치쿠, 도호와의 3사 체제가 성립되었다.
정보국은 영화 업계를 쇼치쿠와 도호의 2사 체제로 재편하려 했지만, 신흥키네마 교토 촬영소 소장 나가타 마사카즈가 "통제 회사"의 가능성을 어필하여 3사 체제를 인정받았다.
같은 해 반도 츠마사부로, 카타오카 치에조, 아라시 칸쥬로, 이치카와 우타에몬의 4대 스타 공동 출연작 『유신의 곡』 (감독 우시하라 키요히코)을 발표했다.
영화 업계가 3사 체제가 되면서, 6개의 촬영소가 대영의 산하가 되었다.
국내 영화 배급이 "홍계"와 "백계"의 2계통으로 통합되면서 제작 편수가 감소했다. 교토의 대영 교토·대영 제2, 도쿄의 대영 도쿄 제2를 남기고, 사가노·대영 도쿄 제1·대도의 각 촬영소를 폐쇄했으며, 3곳의 스태프와 배우는 대영 교토·대영 제2·대영 도쿄 제2가 승계했다.
1943년(쇼와 18년), 초대 사장에 작가 키쿠치 칸을 내세웠다.
나가타 마사이치 사장 취임 후 다이에이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황금기를 맞았다. 이 시기 다이에이는 여러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일본 영화를 세계에 알렸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은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3]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의 《지옥문》(1953)은 일본 최초의 컬러 영화로,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4]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5]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우게츠 이야기》(1953)와 《산쇼 대부》(1954)는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을 받았다.[6]
이러한 성과는 하세가와 카즈오, 쿄 마치코, 야마모토 후지코, 와카오 아야코, 이치카와 라이조 등 새로운 스타들을 발굴하고, 타카미네 히데코, 츠루타 코지, 키시 케이코 등 외부 인재를 영입하여 가능했다.
다이에이는 영화 제작 외에도 다이에이 스타즈를 시작으로 다이에이 유니온스를 거쳐 지바 롯데 마린스로 이어지는 프로 야구단을 운영했다.
점령 당국에 의해 숙청당한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 나가타 데이이치는 1947년부터 1971년까지 다이에이의 사장으로 재직했다.[2]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다이에이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을 제작하여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3]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의 ''지옥문''(1953)을 제작하여 해외에서 상영된 최초의 일본 컬러 영화로,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4]과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5]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우게츠 이야기''(1953)와 ''산쇼 대부''(1954), 제10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 출품된 ''여자의 유언(Jokyo)''(1960) 등도 제작했다.[6]
대중적인 측면에서 다이에이는 가츠 신타로 주연의 ''자토이치'' 시리즈,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의 ''네무리 쿄시로'' 시리즈, 오리지널 ''가메라'' 시리즈, ''대마신'' 3부작, ''요괴 대전쟁'' 3부작과 같은 영화 시리즈로 유명했다. 또한 ''소년 젯''(Shōnen Jet)과 같은 텔레비전 시리즈도 제작했다.
다이에이는 이치카와 라이조, 가츠 신타로, 하세가와 가즈오, 야마모토 후지코, 쿄 마치코, 와카오 아야코 등의 배우와 미조구치 겐지, 이치카와 콘, 마스무라 야스조, 다나카 도쿠조,[7] 미스미 겐지[7] 등의 감독, 미야가와 가즈오, 모리타 후지로 등의 촬영 감독과 같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1950년대에는 다이에이가 자체 프로 야구팀인 다이에이 스타즈를 소유했으며, 이 팀은 나중에 다이에이 유니온스를 거쳐 지바 롯데 마린스가 되었다.
나가타 마사카즈는 사원들을 모두 연고 채용으로 채우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높이고 조직을 강화했지만, 조직 내에 근친상간적인 갈등을 많이 낳았다.
나가타 마사이치 사장 시대의 주요 연혁은 다음과 같다.
나가타의 방탕과 업계 전반의 관람객 감소로 다이에이는 닛카쓰와 협력하여 다이니치 에이하이를 설립했지만, 1971년 12월 파산했다.[8]
토쿠마 쇼텐 인수 후, 회사는 ''고''(1982), 새로운 ''가메라'' 3부작(1995, 1996, 1999), 쉘 위 댄스?(1996)와 같은 예술 영화, 구로사와 기요시의 ''회로'', 미이케 다카시의 ''데드 오어 얼라이브'' 시리즈와 같은 장르 영화 등 소수의 영화를 제작했다.
토쿠마 야스요시 사후, 다이에이 영화는 카도카와 쇼텐 출판사에 매각되었다. 2002년 11월, 카도카와 마이히코 회장은 다이에이 영화가 회사의 영화 부문인 가도카와 다이에이 스튜디오와 합병, 카도카와-다이에이 영화 주식회사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9]
2002년 7월 도쿠마 서점은 가도카와 서점에 다이에이가 보유한 모든 영화와 그 배급권 및 비디오 제작권, 조후시의 다이에이 스튜디오(타마가와 촬영소)의 운영 등 모든 사업을 매각하는 데 합의했다.
같은 해 11월, 가도카와의 영상 자회사 "주식회사 가도카와 다이에이 영화"가 설립되어 다이에이는 영업권과 직원의 전부를 여기에 이양하여, 60년의 역사에 사실상 막을 내렸다. 법인 자체는 2003년 1월에 해산, 2007년 4월에 청산 결료되어 명실공히 소멸되었다.
2. 1. 설립 배경 (1942-1945)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정부는 자원 활용을 합리화하고 영화 매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영화 산업을 재편하려 했다.[1] 모든 영화 스튜디오를 두 개의 회사로 합병하려는 정부 계획에 반대하여, 신코 키네마의 임원 나가타 마사이치는 세 개의 스튜디오를 설립하는 대안을 강력히 추진했다.[1] 그의 노력으로 1942년 신코 키네마, 다이토 에이가, 닛카츠의 제작 부서(닛카츠 극장은 합병에 참여하지 않음)가 합병하여 '''다이 니폰 에이가 세이사쿠 가부시키 가이샤'''(大日本映画製作株式会社), 줄여서 다이에이가 설립되었다.[1] 키쿠치 칸이 초대 사장을 맡았고, 나가타는 임원직을 계속 수행했다. 다이에이의 스튜디오는 도쿄 조후와 교토 우즈마사에 있었다.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전시 통제의 일환으로 소규모 기업을 정리·통합하는 전시 기업 통합이 시작되었고, 내각 정보국의 지시에 따라 다양한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영화 업계에서도 1942년(쇼와 17년), 신흥키네마, 대도영화, 닛카츠 제작 부문을 중심으로 합병이 이루어졌다. 나가타 마사카즈 (전무), 카와이 류사이 (전무), 마나베 야치요 (감사역), 하타노 케이조 (상무), 로쿠샤 오사무 (상무), 코모노 나오미 (상무), 요시오카 쥬자부로, 츠루타 손베이, 하야시 히로타카 (도쿄 요시모토)의 9명이 발기인이 되어, 1942년 1월 27일에 '''다이일본영화제작 주식회사''' (대영)가 탄생하여, 쇼치쿠, 도호와의 3사 체제가 성립되었다.
정보국의 당초 안에서는 영화 업계를 쇼치쿠와 도호의 2사 체제로 재편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신흥키네마 교토 촬영소 소장 나가타 마사카즈가 정부 측의 제3세력으로서 "통제 회사"의 가능성을 어필하여, 최종 안에서는 3사 체제로 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신흥키네마는 쇼치쿠 계열이었고, 사실상 쇼치쿠의 자회사였지만, 동사가 주도하여 기업 통합이 이루어진 것은 세상을 놀라게 했고, "신흥키네마에서 정보국 제5부에 돈이 움직인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퍼졌다. 진상은 불명하지만, 대영의 사사(社史)도 이 사실을 숨김없이 게재하고 있다.
같은 해 반도 츠마사부로, 카타오카 치에조, 아라시 칸쥬로, 이치카와 우타에몬의 4대 스타의 공동 출연을 내건 첫 작품 『유신의 곡』 (감독 우시하라 키요히코)을 발표하고, 영화 제작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영화 업계가 3사 체제가 되면서, 6개의 촬영소가 대영의 산하가 되었다.
국내 영화의 배급 계통이 "홍계"와 "백계"의 2계통으로 통합되면서, 쇼치쿠와 도호와 배급 틀을 나누는 형태가 된 대영은 제작 편수의 감소를 불가피하게 되었다. 교토의 대영 교토·대영 제2, 도쿄의 대영 도쿄 제2를 남기고, 사가노·대영 도쿄 제1·대도의 각 촬영소를 폐쇄했으며, 3곳의 스태프와 배우는 대영 교토·대영 제2·대영 도쿄 제2가 승계했다.
1943년(쇼와 18년), 초대 사장에 작가 키쿠치 칸을 내세웠다. 당초의 사명 표기는, 대영 마크에 덮이는 듯이 구 사명이 세로 표기로 줌하면서 크레딧되었다.
2. 2. 황금기 (1940년대 후반 - 1960년대)
나가타 마사이치 사장 취임 후 다이에이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황금기를 맞았다. 이 시기 다이에이는 여러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일본 영화를 세계에 알렸다.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은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해 일본 영화 최초로 국제적인 상을 받았다.[3]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의 《지옥문》(1953)은 일본 최초의 컬러 영화로,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4]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5]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우게츠 이야기》(1953)와 《산쇼 대부》(1954)는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을 받았다.[6]
이러한 성과는 하세가와 카즈오를 중심으로 쿄 마치코, 야마모토 후지코, 와카오 아야코, 이치카와 라이조 등 새로운 스타들을 발굴하고, 타카미네 히데코, 츠루타 코지, 키시 케이코 등 외부 인재를 영입하여 가능했다.
다이에이는 영화 제작 외에도 다이에이 스타즈를 시작으로 다이에이 유니온스를 거쳐 지바 롯데 마린스로 이어지는 프로 야구단을 운영했다.
2. 2. 1. 나가타 마사이치 사장 시대
점령 당국에 의해 숙청당한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 나가타 데이이치는 1947년부터 1971년까지 다이에이의 사장으로 재직했다.[2]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다이에이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을 제작하여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일본 영화 최초로 국제적인 상을 받아 일본 영화를 세계에 알렸다.[3] 다이에이는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의 ''지옥문''(1953)을 제작하여 해외에서 상영된 최초의 일본 컬러 영화로,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4]과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5] 또한,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우게츠 이야기''(1953)와 ''산쇼 대부''(1954), 제10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 출품된 ''여자의 유언(Jokyo)''(1960) 등도 제작했다.[6]대중적인 측면에서 다이에이는 가츠 신타로 주연의 ''자토이치'' 시리즈,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의 ''네무리 쿄시로''(''죽음의 졸린 눈'') 시리즈, 오리지널 ''가메라'' 시리즈, ''대마신'' 3부작, ''요괴 대전쟁'' 3부작과 같은 성공적인 영화 시리즈로도 유명했다. 또한 ''소년 젯''(Shōnen Jet)과 같은 텔레비전 시리즈도 제작했다.
다이에이는 이치카와 라이조, 가츠 신타로, 하세가와 가즈오, 야마모토 후지코, 쿄 마치코, 와카오 아야코 등의 배우와 미조구치 겐지, 이치카와 콘, 마스무라 야스조, 다나카 도쿠조,[7] 미스미 겐지[7] 등의 감독, 미야가와 가즈오, 모리타 후지로 등의 촬영 감독과 같은 재능있는 인물들을 배출했다.
1950년대에는 다른 몇몇 일본 영화 스튜디오와 마찬가지로, 다이에이는 자체 프로 야구팀인 다이에이 스타즈를 소유했으며, 이 팀은 나중에 다이에이 유니온스가 되었다. 이 팀들은 결국 지바 롯데 마린스가 되었다.
나가타 마사카즈는 여러 회사를 통합하여 오너가 된 후, 사원들을 모두 연고 채용으로 채우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높이고 조직을 강화했지만, 조직 내에 근친상간적인 갈등을 많이 낳았다. 다이에이의 사풍은 닛카츠의 전통을 계승하여, 오노에 마츠노스케가 보수적인 교토에 가져온 자유로운 기풍이 하이카라한 전통을 낳았다. 다른 회사뿐만 아니라 동서 촬영소끼리도 라이벌 의식을 가지는 배타적인 기풍도 남아 있었다. 기획 회의는 교토 작품도 반드시 도쿄 본사 4층 회의실에서 나가타 사장을 필두로 40명에 달하는 프로듀서 등이 모여, 최종 결정은 반드시 나가타가 내리는 체제를 갖추었다. 도쿄와 교토의 촬영소는 촬영 설비와 기재를 나가타의 독단으로 최신식으로 갖추었지만, 도산할 때까지 자체 현상소는 갖추지 않았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 다이에이는 한때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직영 흥행관이 도호나 쇼치쿠에 비해 수가 훨씬 적어 흥행 수입에 큰 영향을 받았다. 영화 산업의 근대화와 쇠퇴가 진행되면서, 나가타의 전 시대적인 "카츠도우야"의 체질을 남긴 채 엉성한 회계 처리와 공사 혼동의 전형적인 원맨 경영은 다양한 폐해를 낳았고, 결국 다이에이의 파탄에 이르렀다.
나가타 마사이치 사장 시대의 주요 연혁은 다음과 같다.
2. 3. 경영 악화와 파산 (1970년대)
나가타의 방탕과 업계 전반의 관람객 감소로 고통받던 다이에이는 닛카쓰와 협력하여 다이니치 에이하이를 설립하여 생존을 시도했지만, 결국 1971년 12월 파산했다.[8]수 개 회사를 통합하여 오너가 된 나가타 마사카즈는 사원을 모두 연고 채용으로 채우는 회사 조직을 만들면서, 자신의 카리스마를 높이고 조직을 강고하게 만들었지만, 조직 내에 근친상간적인 갈등을 다수 낳았다.
사풍은 닛카츠의 전통을 계승하여, 오노에 마츠노스케가 보수적인 교토의 토양에 가져온 자유로운 기풍이 하이카라한 전통을 낳았다. 타사 간뿐만 아니라, 동서 촬영소끼리도 라이벌 의식을 가지는 배타적인 기풍도 남았다. 기획 회의는, 교토 작품도 반드시 도쿄 본사 4층 회의실에 나가타 사장을 필두로 40명에 달하는 프로듀서 등이 모여, 최종 결정은 반드시 나가타가 내리는 체제를 갖추었다. 도쿄와 교토의 촬영소는, 촬영 설비도 기재도 나가타의 독단으로 최신예의 것이 갖춰졌지만, 도산할 때까지 자사 현상소는 갖지 않았다.
이 체제 하에서 다이에이는 한때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직영 흥행관이 도호나 쇼치쿠에 비해 수적으로 훨씬 열세여서, 흥행 수입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영화 산업의 근대화·쇠퇴가 진행됨에 따라, 나가타의 전 시대적인 "카츠도우야"의 체질을 남긴 채의 엉성한 회계 처리와, 공사 혼동한 전형적인 원맨 경영은 다양한 폐해를 낳아, 최종적으로 다이에이의 파탄에 이르렀다.
2. 4. 도쿠마 쇼텐 인수와 부활 시도 (1974-2002)
나가타의 방탕과 업계 전반의 관람객 감소로 어려움을 겪던 다이에이는 닛카쓰와 협력하여 다이니치 에이하이를 설립, 생존을 시도했지만 1971년 12월 결국 파산했다. 미술 감독 니시오카 요시노부를 비롯한 스튜디오 직원들은 ''에이조 교토 프로덕션''을 설립했다.[8] 그러나 노조의 다른 구성원들은 출판사 토쿠마 쇼텐의 사장 토쿠마 야스요시를 설득, 1974년에 회사를 부활시켰다.[1] 이후 회사는 제작사로서 ''고''(1982), 새로운 ''가메라'' 3부작(1995, 1996, 1999), 쉘 위 댄스?(1996)와 같은 예술 영화, 구로사와 기요시의 ''회로'', 미이케 다카시의 ''데드 오어 얼라이브'' 시리즈와 같은 장르 영화 등 소수의 영화만을 제작했다.토쿠마 야스요시 사후, 다이에이 영화는 카도카와 쇼텐 출판사에 매각되었다. 2002년 11월, 가도카와 마이히코 회장은 다이에이 영화가 회사의 영화 부문인 가도카와 다이에이 스튜디오와 합병, 카도카와-다이에이 영화 주식회사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9]
2. 5. 카도카와 쇼텐에 매각 (2002-현재)
나가타 히로시의 방탕과 업계 전반의 관람객 감소로 어려움을 겪던 다이에이는 닛카쓰와 협력하여 다이니치 에이하이를 설립했지만, 결국 1971년 12월 파산했다. 미술 감독 니시오카 요시노부와 스튜디오의 다른 직원들은 '에이조 교토 프로덕션'을 설립했다.[8] 그러나 노조의 다른 구성원들은 출판사 도쿠마 서점의 사장인 도쿠마 야스요시를 설득하여 1974년에 회사를 부활시켰다.[1] 회사는 제작사로서 소수의 영화만 제작했으며, 그중 일부는 국제 합작 영화인 ''고''(1982), 새로운 ''가메라'' 3부작(1995, 1996, 1999), 쉘 위 댄스?(1996)와 같은 예술 영화, 구로사와 기요시의 ''회로'' 또는 미이케 다카시의 ''데드 오어 얼라이브'' 시리즈와 같은 장르 영화였다.도쿠마 야스요시가 사망한 후, 다이에이 영화는 카도카와 쇼텐 출판사에 매각되었다. 2002년 11월, 카도카와 마이히코 회장은 다이에이 영화가 회사의 영화 부문인 카도카와 다이에이 스튜디오와 합병하여 카도카와-다이에이 영화 주식회사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9] 2004년에는 다이에이(Daiei)라는 이름을 버리고 현재는 카도카와 픽처스로 알려져 있다.
2002년 7월 도쿠마 서점은 가도카와 서점에 다이에이가 보유한 모든 영화와 그 배급권 및 비디오 제작권, 조후시의 다이에이 스튜디오(타마가와 촬영소)의 운영 등 모든 사업을 매각하는 데 합의했다.
같은 해 11월, 가도카와의 영상 자회사 "주식회사 가도카와 다이에이 영화"가 설립되어 다이에이는 영업권과 직원의 전부를 여기에 이양하여, 60년의 역사에 사실상 막을 내렸다. 법인 자체는 2003년 1월에 해산, 2007년 4월에 청산 결료되어 명실공히 소멸되었다.
3. 주요 작품
다이에이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3. 1. 영화
다이에이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1950)을 제작하여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 일본 영화 최초로 국제적인 상을 받았다.[3] 또한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의 지옥문(1953)을 제작하여 최초의 일본 컬러 영화로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4]과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5]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우게쓰 이야기(1953)와 산쇼다유(1954), 제10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 출품된 여자의 유언(1960)도 다이에이에서 제작한 유명한 영화이다.[6]
대중적인 측면에서 다이에이는 가츠 신타로 주연의 자토이치 시리즈,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의 네무리 쿄시로 시리즈, 오리지널 가메라 시리즈, 대마신 3부작, 요괴 대전쟁 3부작과 같은 성공적인 영화 시리즈로도 유명했다.
1971년 12월, 다이에이는 파산했지만, 도쿠마 쇼텐의 사장인 도쿠마 야스요시의 도움으로 1974년에 회사를 부활시켰다.[1] 이후 고(1982), 새로운 가메라 3부작(1995, 1996, 1999), 쉘 위 댄스?(1996),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회로,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데드 오어 얼라이브'' 시리즈와 같은 영화를 제작했다.
카도카와 쇼텐 출판사에 매각된 후, 2002년 11월 다이에이 영화는 회사의 영화 부문인 카도카와 다이에이 스튜디오와 합병하여 카도카와-다이에이 영화 주식회사를 설립했다.[9] 2004년에는 다이에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현재는 카도카와 픽처스로 알려져 있다.
3. 2. 애니메이션
다이에이가 제작에 참여한 애니메이션 작품은 다음과 같다.- 라 블루 걸 EX
- 마법사에게 소중한 것
- ''개그 형사''
- OVA(1989)
- ''라 블루 걸''(1989–1992)
- ''다크 미스''(1990)
- ''다크 워리어''(1991)
- ''마큐 센조 2''(1991)
- ''라 블루 걸 EX''(1994)
- ''호카고의 사무실''(1994)
-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
- ''트윈 돌스''(1994)
- ''비너스 5''(1994)
- ''레슨 XX''(1995)
- ''트윈 엔젤스''(1995)
- ''코테츠의 모험''(1996–1997)
- ''퓨어 러브''(1998–1999)
- ''테라 스토리''(1998)
- ''썸데이즈 드리머즈''(2003)
4. 다이에이 뉴스
1962년까지 다이에이 작품의 예고편을 공개한 단편 필름으로, 900편 이상이 제작되었다.
5. 관련 인물
6. 한국과의 관계
다이에이는 여러 일본 영화를 제작, 배급하였으며, 이 중에는 한국과 관련된 작품도 있다. 예를 들어 금환식, 너는 분노의 강을 건너라 등이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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他の映画会社は「55歳定年制」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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波瀾と浪漫の球団。マリーンズの前身、オリオンズ
https://column.sp.ba[...]
週刊ベースボール(2018年5月27日作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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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本映画発達史5 映像時代の到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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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平成19年(ワ)第11535号著作権侵害差止請求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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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経産業新聞』1977年9月16日付け
日経産業新聞
1977-09-16
[20]
서적
『映画館のある風景 昭和30年代盛り場風土記・関東編』
キネマ旬報社
[21]
문서
単独配給は5月まで。6月からは、ダイニチが大映と日活の2社製作作品の配給を開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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